드림엑스 뉴스 : [양의모의 생각 바로하기] 가치와 실용

[양의모의 생각 바로하기] 가치와 실용

알티케이뉴스 2020-10-30 02:31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 '주전장'(主戰場)은 국내보다 일본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일본계 미국인 미키감독이 영화에서 한 말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가치'의 중요성이었다. 한일 역사문제에 있어 일본 자체가 아니라 일본이 일본군위안부 등을 통해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훼손한 사실을 비난해야 보다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미키 감독의 주장은 링컨의 '게티스버그연설'을 떠올리게 했다. 누구나 아는 명연설이지만 제대로 이해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만 강조해 막상 연설의 배경이나 취지에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아 조금 안타깝다.
우연히 데일 카네기의 링컨에 대한 서적을 접해 링컨 매니아가 된 결국 필자는 '21세기 대한민국, 19세기 링컨에게 길을 묻다'라는 A4용지 90페이지 정도의 제법 방대한 원고를 작성했다. 사정상 출판은 실패했지만 가끔 글에 인용하고 있다. 링컨의 삶을 공부할수록 그의 위대함이 살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감동에 젖게 됐다.
우리가 그를 '노예해방자'라는 틀에만 가두고 있지만 링컨의 진정한 업적은 오늘날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기초를 쌓은 것이다. 물론 '노예해방'을 통한 소중한 가치의 실현도 중요한 업적이긴 하나 미국 통합이란 큰 그림에 의해 이뤄진 결과다. 민주화 과정에 있던 우리로서는 노예해방에 자연 큰 관심을 가지게 됐지만 보다 큰 그림을 통해 봤으면 한다.
게티스버그 연설은 남북전쟁 향방을 결정 지은 게티스버그 전투 전사자의 시신을 묻은 국립묘지 완성 기념식에서 행해졌다. 북부는 이 승리로 우위를 점했고 북부 인사들은 승리의 기쁨에 들떠 있었다. 링컨의 연설은 명연설가 에드워드 에버렛 연설 뒤를 이었지만 그의 짧은 연설은 에버렛의 긴 연설보다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 되며 오늘에 이르렀다.
링컨 연설은 그의 인생 자체가 그렇듯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남부에 대한 비난이나 공격도, 승리에 대한 찬사도, 앞으로의 싸움에 대한 결의도 다지지 않았다. 그가 내세운 것은 오직 하나 자신을 포함한 미국인들이 추구해야 할 가치였다. 그것이 유명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이 지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게 해야 합니다"로 표현됐다. 87년 전에 숭고한 가치를 위해 조상들이 세운 이 정부를 존립 위기에서 구하고자 죽어간 사람들을 기념코자 자신들이 모였으나 진정 죽은 자들을 위해 해야 할 사명은 바로 숭고한 가치를 실현하는 자신들의 정부를 지켜 영원토록 하는 것이 연설의 취지인 것이다.
게티스버그의 연설은 일관된 링컨 삶의 자세에 따른 자연스러운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결코 적을 적대시하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안일하게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정략적인 인물도 아니었다. 그에게 강화를 제안한 장군을 "감히 강화를 입에 담다니...그러고도 그대가 한나라의 장군이란 말인가"라는 단호한 말로 꾸짖은 링컨의 모습은 그가 추구하는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이상주의자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자신이 추구하려는 가치와 미국의 분열을 막고 위대한 미국으로 나아가야 하는 실용적 목표를 함께 이룬 위대한 지도자였다.
필자가 링컨에 대한 글을 쓴 것이 2012년 가을인데 18대 대선이 다가오던 시절이었다. 때마침 불어온 '안풍'에서 링컨의 모습을 발견코자 노력했다. 당파성이 약한 안철수 후보가 링컨과 같은 지도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컸다. 노무현·이명박 시대를 거치면서 둘로 쪼개진 우리 모습에서 남북분단으로 다투던 링컨의 시대를 떠올렸다. 국가가 더욱 분열될 것 같은 위기에서 중립적인 안 후보의 가치를 내세워 이 나라를 구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을 가졌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도 분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 출판을 하고자 원고를 출판사에 보냈을 때 들은 이야기다. "선생님 글은 너무 좋은데 우리와 이념이 맞지 않아 출판이 어렵겠습니다." 이념적 성향이 강한 그 출판사는 이념에 의해 발목을 잡힌 셈이다. 필자에게도 이념은 있지만 그것에 집착해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보낸 원고도 나름대로 좌우를 아우르며 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해 작성한 것이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아직도 이념에 사로잡혀 진실을 볼 수 없는 사람들 앞에서 그것은 헛된 노력에 불과했다.
21세기의 우리는 아직도 19세기의 링컨에게 길을 물어야 할 것 같다. 오늘날까지 미국은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와 같이 극단적 이념대결을 벌이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어쩌면 링컨의 노력이 낳은 결과는 아닐까 싶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노무현이 만난 링컨'을 쓰면서까지 그를 본받고 싶어 했지만 결국 이념적 대립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노 전 대통령이 결국 링컨의 길을 제대로 따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위의 글에서 노 전 대통령과 링컨의 닮은 점, 다른 점으로 그것을 지적했다. 노 전 대통령은 결국 지지자들 속에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고. 노 전 대통령의 실패는 개인적 문제에 기인한 것이기보다 우리가 직면한 이념적 대립이 링컨 당시 미국보다 더 심했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하겠다. 우리의 이념적 대립은 상대의 주장에 귀를 기울일 여지를 없애버릴 정도다.
그렇다면 우리가 19세기 링컨에게 무엇을 배워야 할까. 많은 세월이 흘러갈지라도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제인 것 같다. 링컨의 정치가로서 자세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지, 아니면 차라리 이념으로 분리됐으니 계속 이념적 대립을 밀고 나가 그 가운데에서 최선의 길을 찾아야 할지 선택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가치와 실용을 함께 이루고자 한 그의 자세는 아무리 생각해도 버릴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싶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히토츠바시대학교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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